복지분야 누리집 - 서울특별시





		
		

	 
	
	

서울시, 노숙인 신용회복 통해 자활기반 마련 지원

담당부서
자활지원과
문의
2133-7493
수정일
2013.02.05
         
  •  시, ‘신용회복지원사업’ 통해 작년 취약계층 306명 채무 175억원 감면 지원

  •  ‘11년 105명에서 ’12년 306명으로 신용회복 노숙인 약 3배 증가

  •  노숙인 시설 종사자의 맞춤형 교육 및 상담으로 신용 회복대상자 적극 발굴

  •  소송비용, 법률상담 등 실제적 도움되는 서비스 지원 및 유관기관과 연계강화

  •  市, 본인명의 금융거래 및 취업 등 통해  정상적인 사회복귀 기대

 

□ “낮에는 보험영업을 하고 새벽에는 신문배달을 하고, 주말에는 일용직 일을 하였지만 빚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파산면책 결정 후 아이들을 만났는데 ‘아빠,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저희들 생각하면서 힘내세요.’ 라는 문자를 받고 눈물이 났습니다. 해체된 가정을 복구하고 가족 간의 사랑을 나누면서 사는 것이 저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장OO, 남 54세, 아침을여는집)

서울시는 과중채무, 체납으로 경제적 자활이 어려운 노숙인․쪽방촌 거주자의 자활과 자립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신용회복 지원사업’으로 작년 한 해 저소득 취약계층 306명이 채무 175억원을 감면 받았다고 밝혔다.

  ○ ‘신용회복지원사업’은 서울시가 대한법률구조공단,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신용회복위원회 등 유관기관과 힘을 모아 저소득 취약계층의 자활‧자립을 돕기 위해 시작되었으며, 2008년부터 2012년까지 1,048명의 취약계층 시민들에게 약 562억원의 채무를 감면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 시가 작년 2월부터 노숙인과 쪽방주민들의 신용회복을 위해 지원을 대폭 확대한 결과 ‘11년 105명에서 `12년에는 3배가 늘어난 306명이 혜택을 받았다.

  ○ 이번 신용회복 노숙인들은 거리노숙인 절 명의도용 피해를 당해 4억원 채무 파산․면책 받은 분(한◯◯, 남 51세), 부산시설관리공단 근무 중 8년간 딸 백혈병 치료비로 가정이 파탄나고 1억1천만원 파산․면책 받은 분(이◯◯, 남 60세), 헤어살롱을 운영하다 영업부진으로 부도 후 2억4천6백만원을 파산선고 받은 분(곽◯◯, 여 59세), 알코올 중독으로 8,600만원 파산선고 받은 분(이OO, 남 59세) 등 사연은 다양했다.

□ ‘신용회복 지원 사업’ 신청자들의 신용회복 내역을 살펴보면 ▴개인파산 114억원(65.1%) ▴면책 47억원(26.8%) ▴개인회생 2억원(1.1%) ▴워크아웃 12억원(6.9%) ▴건강보험료 결손처분 9천만원(0.5%) 등으로 나타났다.

                               ※ 연도별 신용회복 추진실적 현황

                                                                        (단위 : 백만원)

사  업  분  야

협조기관

’08년

’09년 

’10년

’11년

’12년

인원

금액

인원

금액

인원

금액

인원

금액

인원

금액

 

411

14,016

110

9,046

116

5,493

105

10,180

306

17,578

개인파산․면책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대한법률구조공단

138

13,296

47

8,260

43

4,604

44

9,103

110

16,063

개인회생․워크아웃

신용회복위원회

52

626

53

780

73

889

61

1,077

119

1,425

건강보험료 체납금

결손 처분

국민건강보험공단

221

94

10

6

-

-

-

-

77

88

 

□ 서울시는 신용불량 노숙인의 특성상 소득이 있더라도 채권기관들의 추심으로 인해 은행거래를 할 수가 없어 저축을 하지 못하고 자립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판단, 신청자들의 무료법률교육 및 개별상담, 증빙서류 발급▪소장 작성대행, 파산관재인 선임비 등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서비스를 지원하고 있다.

□ 이밖에도 서울시는 지난해 2월부터 각 분야별 전문가를 초빙하여 4회에 걸쳐 신용회복 지원 시설 종사자 182명을 교육하였고 신용불량 노숙인에 대한 방문상담도 실시했다.

  ○ 대한법률구조공단 및 가정법률상담소에서는 파산․면책제도 종합안내와 신청절차 등을 교육하고, 신용회복위원회는 개인회생 및 워크아웃, 국민건강보험공단은 건강보험료 결손처분 신청대상 및 기준과 신청기간 및 방법 등에 대해 교육했다.

  ○ 특히, 신용회복위원회에서는 39개 노숙인 시설을 찾아 신용불량 노숙인을 대상으로 방문상담을 실시했다.

□ 또한, 서울시는 노숙인 복지시설의 신용회복 실적을 평가해 우수시설과 우수 직원에 대하여 운영비 추가지원 및 여행상품권 제공으로 각 시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 앞으로도 서울시는 대한법률구조공단, 신용회복위원회, 건강보험관리공단, 국세청 등 유관기관과 협조를 강화하여 노숙인 등 취약계층의 금융기관 채무 불이행에 따른 신용불량 문제를 해결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 김경호 서울시 복지건강실장은 “감당하기 어려운 금융기관 채무로 삶을 포기한 노숙인, 쪽방주민 등 취약계층 시민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준다는 점에 있어서 신용회복사업은 정상적인 사회복귀의 첫 걸음” 이라며 “빈곤시민의 자활의욕을 고취시키고 생활안정에 기여할 것” 이라고 말했다.

      

<신용회복 미담사례>

다시 살아갈 희망을 가져 봅니다.

                                                                                옹달샘드롭인센터 곽OO(59, 여)

저는 1954년에 태어나 1983년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관광경영학을 수료하였습니다. 1994년 말부터 이듬해 3월까지 과천시 별양동의 호프호텔 1층에서 미지트 가구점을 운영하였습니다. 다행이 영업이 잘되어 같은 호텔 3층에 대형가구점 우드하우스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또 용산 이태원동에 소재한 미지트가구 이태원점까지 운영하는 등 총 3개의 가구점을 거느리며 나름 성공한 삶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IMF로 인한 경제침체와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경영상태가 악화되었고 결국 영업부진으로 부도처리하게 되었습니다. 1995년 3월부터 1997년 7월까지 기림갈비집을 운영하면서 부채를 지게 되어 제  소유의 호프호텔 3층 307호를 경매로 처리하였습니다. 어머니께 죄송하게도 어머니 소유의 의왕시 소재한 신안 아파트도 헐값에 매매하였습니다. 그럼에도 2억이 넘는 채무가 남았습니다.

이로 인해 가정은 파탄이 나서 이혼하고 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영국의 친정언니 댁을 방문하던 차 1999년 6월부터 2006년 10월까지 7년 9개월간 워킹비자(노동허가서)를 발부받아 콩코리아 미용대학과 컬럼비아 미용대학에서 미용강사로 근무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영주권을 취득하지 못하여 귀국하게 되었고 2011년 11월부터 강동구 올림픽로에서 로조헤어살롱을 운영하였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영업부진에 건강마저 악화되었습니다(병명 : 근육둘레띠 증후군(우측), 경추부 및 요추부 통증, 내측 상과염). 강동구 암사동의 드림재활의학과에서 2012년 3월부터 치료를 받으며 2012년 4월 로조헤어살롱을 폐업할 수 밖에 없었고 어머니는 친척집에 잠시 계시게 되었습니다. 저는 불행 중 다행으로 여성노숙인 쉼터인 열린여성센터의 도움으로 강동구 천호동의 고시텔에서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열린여성센터의 소개로 옹달샘드롭인센터란 곳에서 노숙인을 위한 신용회복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옹달샘에 방문하여 담당자인 김동혁 실장님을 만나 상담을 받아 보니 신용회복을 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실장님의 도움으로 2012년 6월 개인파산 및 면책을 신청하였고 9월 25일 부채 2억4천6백여만원에 대핸 파산선고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직 면책은 받지 못했으나 1월 30일에 면책이 예정되었습니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암담하기만 했던 부채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또한 열린여성센터의 소개로 송파주거복지센터를 통해 매입임대주택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건강도 많이 좋아졌고 채무에 대한 부담도 사라져 다시 살아갈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순간의 실수로 4억원의 빚이...

                                                                              양평쉼터 한OO(51세, 남)

 어렸을 적 집안형편이 어려워 저는 큰아버지 댁으로 입양되어 생활하였습니다. 큰아버지는 저를 친 자식처럼 돌봐주면서 학업에 열중하여 학자나 법조인이 되기 원하셨지만 전 공부가 너무 싫어 중학교 시절 중퇴를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제 인생에 가장 후회하는 시절이기도 합니다.

성인이 되고서도 마땅한 직업 없이 백수생활을 즐기던 저에게 부모님은 지인에게 부탁하여 1998년 구두공장에 저를 취업 시켰습니다. 구두공장 취업 후 5년간 모은 돈으로 길거리에서 생활용품 자판장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처음 시작한 장사는 쉽지 않았지만 정말 살려고 열심히 했습니다. 매일 새벽에 시장에 가서 물건을 구매하고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장사를 했습니다. 당시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싶은 마음에 장사를 하는 동안 너무 즐겁게 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장사한지 3년이 지난 후 IMF로 거리노점상들이 늘어나면서 설자리가 없어졌고 결국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월세 낼 돈도 부족해진 저는 결국 2000년 8월 서울역에서 거리노숙을 하였고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술에 찌들어 살았던 것 같습니다. 거리에서 구걸까지 하면서 끼니를 때우고 있는 저에게 누군가 다가와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해준다며 제 명의를 요구하였고 몇 번 거절을 하였으나 명의를 빌려주지 않으면 노숙생활 하기 힘들 거라면서 괴롭혔고 결국 참다못해 명의를 빌려 주었습니다. 제 명의를 받은 이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잠적했고 전 모든 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길거리 노숙과 쉼터를 반복하며 생활하던 저에게 양평쉼터 입소는 특별했습니다. 입소 전부터 노숙생활을 끝내고픈 의지가 강해 자활을 하고 싶어서 택한 쉼터 였기 때문입니다. 쉼터에 입소하여 모범적으로 생활한지 6개월 저에게도 자활의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바로 쉼터공공근로 일자리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허리통증이 심해 인력일을 나갈 수 없던 저는 유일한 자활의 희망이 바로 공공근로였습니다.

자활성공을 꼭 하고 싶은 마음에 첫 달 월급은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모두 저금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3일 뒤 우체국 통장이 압류되었고 채무 빚이 4억이 넘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너무 절망적이었습니다. 절망을 하고 있을 때 쯤 서울시 자활지원과에서 하는 신용회복지원사업에 혜택을 받을 수가 있었고 쉼터 담당선생님에 도움으로 2011년 8월에 파산면책 신청서를 접수하고 2012년 8월 28일 면책을 받았습니다. 면책 결정문을 받고 자활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지금은 공공근로 일을 하면서 받은 돈은 대부분 저축을 하고 있고 술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다시 사회로 나가 자활하여 가정을 꾸리고 싶은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공무원에서 노숙인으로

                                                        영등포보현의집(전 양평쉼터) 이OO(60, 남)

전 20년 전 부산시설관리공단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었습니다. 안정적인 직장과 사랑하는 배우자와 딸 둘과 함께 남부럽지 않게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았습니다. 1997년경 둘째딸이 백혈병이란 질병이 생기기 전까지는요...

사랑하는 둘째딸에게 찾아온 백혈병은 딸의 목숨뿐만이 아니라 저희 가정까지 파탄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8년간 백혈병 치료를 하면서 모아놓은 돈이며 카드빚 사채까지 모두 빌려 병원비와 생활비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때당시 딸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장기간 병원치료를 하다 보니 가족들도 지치고 저도 너무 힘들더군요. 배우자와도 많은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제 사랑하는 딸을 살리는 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2004년 배우자와 이혼 후에도 딸 치료에 전념을 했지만 결국 2005년 딸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 모든 것을 잃은 심정이었고 앞으로의 삶도 포기가 되더군요.

2006년 빚 독촉을 견디지 못해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노숙생활을 했습니다. 길거리 노숙은 정말 힘들었고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쉼터란 곳을 알게 되어 입소하게 되었고 자활준비를 했었습니다. 2012년 2월 서울시 자활지원과에서 지원하는 영농학교란 곳을 소개받을 수 있었고 2012년 2월 양평쉼터로 입소하여 영농기술습득 후 영농자활을 해보고 싶다는 비전이 생겼습니다.

다시 자활의 비전은 생겼지만 1억1천만원이란 채무는 언제나 제게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걱정도 잠시 서울시 신용회복사업을 알게 되었고 선생님의 도움 끝에 2012년 7월에 파산면책 신청을 하여 단 4개월만인 11월 23일에 면책 판정을 받았습니다. 아마 노숙인 신청자중 가장 최단시간에 면책을 받은 신청인이라고 하더군요.

너무 기분 좋고 행복했습니다. 다시 새로운 삶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고 희망이 자꾸 커지더군요. 11월 30일 영농학교 졸업 후 저는 우수졸업자로 선정되어 서울시에서 지원을 받아 농사를 지을 수 잇게 되었습니다.

희망이 현실이 되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올겨울이 지나면 저는 영농자활을 시작 합니다. 도와주신 모든 분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겠습니다.

 

신용불량자의 꼬리표를 떼고 새로운 삶을 다짐합니다

아침을여는집 장OO(54, 남)

2006년 부동산투기가 극성을 부리던 시기에 기획부동산에 근무하는 지인으로부터 ‘장차장님!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예정지 인근에 좋은 땅이 나왔어요.’ 라고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2007년 7월 동계 올림픽유치만 되면 2배 이상의 투자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말에 현장을 방문한 후 인근 부동산에 더 이상 확인도 하지 않고 사들였습니다.

그 땅은 알고 보니 길도 없는 맹지의 땅, 집도 지을 수 없는 무용지물의 땅이었습니다. 사기를 당한 것입니다 그 후 2011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는 되었지만 제가 매입한 땅은 쓸모없는 땅 전혀 가치 없는 땅으로 전락하고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6년 동안 금융비용으로 지출된 금액은 고스란히 부채로 남게 되었고 훗날 나의 발등을 찍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2007년 구조조정으로 30여년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퇴직 후 받은 퇴직금은 빚 청산과 함께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지출만 하다 보니까 남은 퇴직금은 금방 없어졌습니다. 퇴직 후 여러 가지 자영업 등 많은 일을 해 보았지만 그동안 직장생활만 한 저로서는 사업경험이 전혀 없던 차라 손해를 보기 일 수였습니다.

제2금융권 등 사채까지 끌어 쓰면서 저는 더욱 심각한 자금난에 봉착하면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대출연체가 장기화되고 신용불량자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었습니다. 한때는 신용을 관리하는 은행에서 관리책임자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대출독촉을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저를 수없이 원망하면서 자책 하였습니다.

주야로 걸려오는 대출금 상환독촉 전화는 저의 뼈와 피를 마르게 했습니다. 제가 없을 때는 날마다 가족들에게까지 협박을 일삼는 수준에 이르고 보니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영위할 수가 없어 집사람과의 협의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20년간의 결혼생활도 정리하고 고시원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33평 집에서 살다가 1.5평 쪽방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녀들도 청운의 꿈을 안고 해외유학길에서 도중에 귀국하여 지금은 두 아이 모두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 중에 있습니다. 큰아이는 간호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고 작은아이는 직업전문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한 푼이라도 돈을 벌기 위하여 낮에는 보험영업을 하고 새벽에는 신문배달일을 하고 주말에는 일용직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았지만 워낙 수입대비 지출이 많다보니까 도저히 감당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고시원 월세를 3개월간 밀려서 고시원 아주머니로부터 나가라는 통보를 받고 무작정 짐을 싸서 나왔습니다. 일주일간 사우나에서 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전철 안에서 지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 후 나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지금 제가 거주하고 있는 아침을여는집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지난 겨울에 이곳쉼터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그때는 정말 구세주를 만난 기쁨이었습니다. 소장님 및 실장님의 따뜻한 배려 속에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가족 간의 정을 많이 느끼게 되었고 그제서야 예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집의 소중함을 뼛속 깊이 체험하면서 생활이 안정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곳 쉼터의 도움으로 무료파산 법률상담을 통하여 그동안 끊임없이 괴롭혀 왔던 부채문제도 파산신청을 통하여 2012년 10월23일에 면책을 받았습니다. 면책받기까지 해오름연대 임재원 선생님의 자상한 지도하에 수십번씩 서류를 준비하면서 채권기관과의 마찰도 있었지만 8개월의 기간이 지난 후에 서울중앙 법원으로부터 면책판결을 받고 10월26일 법률구조공단 사무실에서 파산선고에 대한 면책결정 정본을 받던 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홀가분한 심정 금할 길 없습니다.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살던 나에게 파산면책은 희망을 갖게 하였습니다.

지나온 삶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과거의 아픈 경험을 거울삼아 정말 열심히 노력하여 해체된 가정도 복구하고 가족 간의 사랑을 나누면서 생활하는 것이 저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작년 성탄절이브때 두 자녀를 만나고 식사를 하면서 그동안의 이야기를 하고 사진도 찍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평소에 자녀들 뒷바라지를 제대로 못 해주고 돌아오면서 적은금액의 용돈이라도 주면서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아빠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힘들게 번 돈인데 용돈도 주시고... 꼭 필요한 곳에만 쓸게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저희들 생각하면서 힘내세요.’ 라고 하면서 문자를 받았을 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2013년 새해가 시작한지 벌써 일주일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살기좋은마을’에서 택배일을 하고 있습니다. 일할 수 있다는 것에 항상 감사하면서 열심히 노력하여 열매 맺고 후회하지 않는 계사년 한해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남에게 돈을 떼어 먹고는 못산다

                                            서울특별시립비전트레이닝센터   이상화(59세, 남)

나는 늘 홀로서기를 좋아했다.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냐 물으면 “나는 남에 돈을 떼어 먹고는 못산다.”라고 답하였었다. 지금의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있지만 그 전에는 두 다리를 뻗지도 못하고 쓰린 가슴만 내리고 있을 뿐 아무런 도움을 받지도 요청도 하지 못한 채 혼자 끙끙 앓은 소리만 내었던 시절이 있었다.

예전 성동구청에서 공공근로인 희망근로를 통해 다시금 나를 바라보게 되되면서 홀로 서기를 시작하였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더 열심히 하였고 공공근로 반장에게 눈에 띄어 9개월까지 일을 할 수 있었다. 나의 마음은 ‘어떻게 해서라도 노숙이라는 이름을 접어야 하지 않겠냐!라는 생각에 나는 더욱 힘을 내어 나의 앞날을 바라보며 꾸준한 노력을 한 탓에 남보다 부지런 하다는 신뢰를 주었던 것이다.

이런 일을 바탕삼아 딛고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아끼지 않고 노력하였으나, 이렇게 일을 하고보니 나는 더욱 더 술에 의존하였다. 나름대로 스트레스는 쌓이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알코올중독자가 되어가고 있는지 조차 몰랐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비전트레이닝센터에 알코올재활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선 알코올을 나에게서 멀리 하려면 치료부터 받아야 되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고 그 길로 바로 비전트레이닝센터로 달려와 입소를 하였다. 그날부터 나는 굳은 결심을 먹게 되었다. 초심에 입각하여 하루를 살아도 깨끗한 마음가짐, 좀 더 올바른 생활태도 등을 갖춰야겠다는 마음을 잡고 나니 내 마음이 한결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교육을 받으면서 거의 수료를 할 무렵에 사회 블랙리스트에 나의 이름이 늘 따라 다녔다. 다행히 가정법원에 파산을 신청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그날로 신청을 하고 나름대로 변호사가 하라는 대로 여기저기 뛰어 다니기 시작하였다.

직장과 병행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아름다운가게에서 근로를 하면서 토요일과 일요일은 아르바이트를 다니며 무수한 노력을 한 끝에 나는 어렵게 면책선고를 받고 나서야 ‘이제야 하루를 살다 죽어도 아무런 미련은 없겠구나.’ 하는 마음에 이 어려운 세상을 한걸음 내딛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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