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분야 누리집 - 서울특별시





		
		

	 
	
	

서울시, 희망을 저축하는‘노숙인 저축왕 70명’선발

담당부서
자활지원과
문의
2133-7493
수정일
2013-01-02

□ “ ‘다시 시작해보자’ 라는 용기를 가지기까지 참 오래 걸렸습니다. 부산에서 의욕을 가지고 친구들과 함께 운영했던 사업장이 문을 닫고 도망치듯  올라온 서울이 왜 이리 춥던지… 하지만 여성센터의 도움으로 1년 6개월 만에 일자리도 얻고 저축해서 독립도 했습니다. 희망은 다시 찾아옵니다.”

 (강◯◯, 여 51세, 열린여성센터)

□ 서울시는 복지시설에서 생활하는 3,000여 노숙인 중 저축률이 가장  높은 70명을 2012년 저축왕으로 선발했다고 밝혔다.

  ○ ‘08년부터 시행 중인 「서울시 노숙인 저축왕 선발사업」은 복지시설에    입소중인 노숙인을 대상으로 저축을 장려하여 실질적인 자립기반의 발판을 만들고, 보호시설의 체계적인 금전관리를 유도하는 사업이다.

  ○ 저축왕으로 선발되기 위해서는 6개월 이상 꾸준히 근로소득이 있어야   하고, 주택청약저축을 들어야 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하며 자활 및 자립 의지가 강해야 한다.

□ 이들 70명의 노숙인들은 지난 4월부터 11월까지 8개월간 총 5억 3천만원을 벌어 3억 6천만원(약 67%)을 저축하는 놀라운 저축률을 보였고, 이는 노숙인 한 사람당 평균 771만원을 벌어, 516만원을 저축한 것이다.

 

  ○ 특히 70명중 11명은 90%를 넘는 저축률을 기록해 소득의 거의 전부를 저축하는 등 자립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 또한 상위 10%인 7명은 지난4월에서 11월까지의 8개월간 6천 8백만 원을 벌어 6천 7백만 원을 저축해 98.1%의 저축률을 보였으며, 저축액이 1,000만원 이상인 노숙인도 4명으로 나타났다.

  ○ 선발된 노숙인 중에는 가정폭력을 견디지 못해 거리에 나선 여성, 사업이 부도나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이혼한 후 자살을 기도했던 가장, 고아원에서 자라나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일을 해온 사람, 장애를 가진 노숙인도 6명이 포함되어 눈길을 끌었다.

□ 서울시는 노숙인 저축왕으로 선발한 개인 중 상위 10%인 7명에 대해서는 서울시장 상장을 수여하고, 70명 전원을 내년 하반기에 “희망 플러스 통장” 가입 대상자로 추천할 예정이다.

  ○ 또한, 올해 노숙인 저축왕으로 선발된 사람 중 일부는 내년도 저축의날 표창대상자로 추천할 예정이다.

  ○ 서울시는 지금까지 금융위원회가 주관하는 저축의날 모범사례로 노숙인 저축왕 중 14명(09년 2명, 10년 3명, 11년 5명,12년 4명)을 추천하여 표창을 받은 바 있다.

      ※ 서울시 노숙인 저축왕 선발사업

 

구    분

’08년

’09년

’10년

’11년

’12년

선발인원

34명

70명

70명

70명

70명

저축액 (저축율)

207,886천원

(66.6%)

360,853천원

(53.9%)

244,250천원

(60.7%)

262,505천원

(57.1%)

361,725천원

(67.0%)

전체 노숙인시설의

저축증가액

1,070,599

천원

1,207,477

천원

1,060,232

천원

1,207,000

천원

967,521

천원

저축의날 

금융위원장 표창

-

2명

3명

5명

4명

 

□ 한편, 서울시는 「노숙인 저축왕 선발 사업」을 기존의 노숙인 일자리 갖기 사업, 자활 근로사업, 신용회복지원사업, 자격증취득 지원사업 등과 연계하여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도록 지속적인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 김경호 서울시 복지건강실장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다시 일어서기 위하여 저축하는 노숙인들은 저축한 금액에 상관없이 희망을 저축하는 분들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서울시는 더 많은 노숙인들이 저축관리 등을 통해 자립․자활의 희망을 키울 수 있도록 체계적인 지원을 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붙임 : 노숙인 저축왕 관련 사례

 

다시 찾은 기회....

 

구세군 서대문사랑방

신OO(남, 60세)

 

저는 지금에 오기 전까지 누구보다 우여곡절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과거 개인 사업체를 운영할 정도로 남부럽지 않게 행복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경영난으로 인에 사업채를 정리하고 그로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아내와 이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지인에 도움으로 2007년도 경에 영세민에게 지급되는 경기신용보증기금대출자금과 소상공인진흥원에서 이런저런 기타 자금을 받아 약 7000만 원 정도 투자하여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배연정 소머리국밥집을 창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음 요식업으로 창업을 하였지만 정말 장사가 너무나 잘되어 그때 당시만 해도 몇 달만 고생하면 금방이라도 투자받은 돈을 모두 갚을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행복은 잠시...그해 광우병이 발생이 되면서 저에 행복은 그날로 종지부를 찍고 대출이자를 갚지 못해 매일매일 빚 독촉으로 인해 또다시 폐점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걸 정리하고 정리 삶에 아무런 미련 없이 목적 없이 거리를 헤매다가 남아 있는 식구들에게 더 이상 짐이 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삶에 끈을 놓기 위해 한강다리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한강다리 난간에 기대고 있는데 한강 물에 비쳐진 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죽음에 문턱에서 너무나도 나약한 제 모습을... 그렇게 몇 시간을 흘러가는 한강물만 바라보다가 지금 죽지 못하면 살자!~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는 생각으로 최소한 남아있는 신구들과 나를 믿고 도와준 지인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자란 생각에 첫 직업으로 남들이 가장 기피하는 일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이력서를 들고 면접을 받으러 다녔지만 50대 후반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건설직 말고는 쉽게 구하기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구인광고를 보고 영등포에 위치한 모텔에서 청소하는 분을 모집한다고 하여 바로 달려가 면접을 보고 천금 같은 일자리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모텔청소 일자리 이였지만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하던 중에 다시금 마음을 잡지 못하고 하루에도 12번 이상을 5층 창문에서 뛰어내릴 생각만 하던 중에 제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여 화장실 벽에 제 머리를 박곤 했습니다. 그렇게 모텔청소부로 영등포에서 신촌, 신촌에서 왕십리로 다니면서 3년을 화장실청소를 하면서 마음에 안정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후 구리농수산물시장에서 청소부 일을 하게 되었으며 자연스레 나도 뭐라도 배워 보자란 생각에 운전면허시험에 응시해보자 뭐라도 하나 가지고 있음 현재보다 좀 더 많은 일자리를 구 할 수 있을 것만 같아 운전면허증을 취득하게 되었으며 그로인해 운전직으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고시원에서 생활을 하던 본인은 여름철 닭장과도 같은 곳에서 매달 몇 십만 원씩 사용료를 내면서 생활하는 게 너무나도 아까워 서울시에 전화를 걸어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곳이 있는지 문의를 하였으며 그때 소개받은 곳이 다시서기 센터였다 그곳에서 다시 지금에 구세군 서대문사랑방을 소개 해주워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이곳 생활도 이제 벌써 1년이 넘어간다.

처음 구세군 서대문사랑방에서 상담을 받고 입소를 하고 생활을 할 때 너무나도 편하다 여긴 사람도 많고 함께 생활하는 분들과 이런저런 프로그램도 많고 무엇보다 따뜻한 식사는 이제껏 느끼지 못한 행복을 나에게 주웠다...그렇게 마음을 잡지 못하고 몇 번이나 엉뚱한 생각을 했었는데 이곳에서 생활을 하면서 여러 선생님들 덕분에 지금은 몸은 아주 조금 힘들지만 14ton 대형화물차를 운전하면서 조금씩 나의 미래에 대해 계획을 세워보게 되었다...비록 지금은 다른 사람의 차를 운전하는 비정규직 근무자로 근무하고 있지만 여러 선생님들에 도움으로 처음으로 저축이란 걸 하게 되었고 그동안 매일 빚만 갚기 바쁜 내 삶이 이제는 나의 미래 목표를 위해 굳은 각오로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받은 급여에 95%로 이상을 저축과 빚 갚는데 모두 쓰고 있다.

앞으로 4년만 지나면 개인워크아웃 기간도 끝나고 그때쯤이면 중고차지만 대형화물차 한대 정도 구입할 수 있는 목돈이 모와 지면 운송 사업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지금에 이기회가 이제는 내 삶에 다시금 오지 않을 것 같다. 이곳에 생활 또한....다시 찾은 이 기회를 그냥 보낼지 않을 것이다... 다시금 떨어져있는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그날이 빨리 오기위해서라도...

 

 

 

죽을 용기 딛고 올라선 삶

 

서울시립양평쉼터

김OO(남, 63세, 실명공개 불가)

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던 1949년 10월29일 강원도 횡성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정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다. 가정형편이 어렵고 어려서부터 장남이라는 책임감이 남다르던 나는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읍내에서 가장 큰 이발관에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열아홉 살 때 이발사 자격증을 땄고 스물다섯에 친구 소개로 만난 여성과 결혼해 가정을 꾸려 양평에서 15년간 이발관을 운영했다. 이발사를 12명이나 거느릴 정도로 양평에서는 손꼽히는 이발관이었다. 부지런히 벌어 모은 8000만원을 들고 1987년도에 서울 신림동에 자리를 잡았다. 자식은 없었지만 부족할 것 없는 삶이었다.

2007년 10월 잠을 자던 한밤중에 침대에서 쿵 하고 떨어졌고 그 순간부터 팔다리를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의사는 당뇨 때문에 마비가 온 것이라고 했다. 집과 이발관을 팔아 마련한 돈 2억8000만원 중 1억8000만원을 부인에게 떼어 주며 말했다. "내 꼴이 이렇게 됐으니 당신은 좋은 데로 가서 잘 살아." 한 달 300만원 넘게 들던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 석 달 만에 퇴원해 고시원을 거쳐 서울역에서 노숙을 시작했다.

오후 11시가 되면 서울역 역사 한편 구석진 자리에 종이상자 한 장에 의지 한 체 몸을 뉘였다. 여태껏 살면서 이런 추위는 처음 느껴 보는 것 이었다. 그렇게 추위에 떨며 하루...이틀... 을 보내게 되었다..“이러다 죽는 거 아니야?!”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새벽 4시쯤 사람들이 지나다니기 시작하면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고 어디론가 가야 했다. 낮에는 공원, 지하철역,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며 지냈다. 다른 노숙자에게 들은 양평쉼터를 알게 되어 2개월간의 노숙생활을 접고 쉼터에 입소하게 되었다.

쉼터에서 처음 두 달간은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할 만큼 우울증에 시달렸다. 힘겹게 양평대교에 올라 강물에 몸을 던지려 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세 번째로 다리에 올랐을 땐 "죽을 용기가 있다면 살지 못할 이유도 없다"며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쉼터로 돌아와 사무실에 "이발을 해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사무실에서 회의를 통하여 2008년 10월 조촐한 '천막 이발관'을 만들어줬다.

쉼터 가족들에게 이발을 해주고 이발이용료 3천원을 받고 있으며 경제적으로 어렵고 몸이 불편하여 근로활동을 할 수 없는 가족들에겐 무료로 이발을 해주고 있다. 이발소를 이용하는 가족들이 많아지자 2010년에 공동작업장 일부를 이발 공간으로 내주었다. 가족들에게 보다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3천원을 꾸준히 저축하여 모은 돈으로 이발용 의자와 거울 달린 캐비닛을 구입해 제법 이발소처럼 꾸몄다. 이발하는 가족과 이발을 대기하는 가족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많은 옛 노래 테이프를 구비하여 지루함과 감성을 달래 주고 있다.

어려운 사람을 즐거운 마음으로 돕다 보니 자신의 몸과 마음을 고치게 된 것 같다. 일을 시작한지 두 달여 만에 지팡이를 손에서 놓게 되었고 마비가 있던 오른손도 쓸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였다. 11년도부터는 틈틈이 외부 아르바이트 및 소일거리를 하며 이발봉사료 등을 조금씩 받아 저축을 이어가고 있으며 저축을 꾸준히 하여 사회로 복귀하여 자그마한 이발관을 차리고 싶다.

 

‘희 망’

 

흰돌회

조OO(여, 45세/실명공개불가)

 

  제 나이 마흔다섯살 남편이 술만 먹으면 가정 폭력을 일삼는 남편 때문에 십일년 살면서 도저히 살 수가 없기에 우리 아이 삼남매를 데리고 나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술 먹고 들어와 문 늦게 열었다고 때리고 부수고 도저히 이러한 모습을 애들한테 더 보여주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잠자는 틈을 이용해서 아이들 학교 가는 시간 맞춰 좀더 이른 아침에 단돈 27,000원을 가지고 찾아간 곳은 여성센터였습니다.

  그전서부터 이러한 사정을 잘 아는 언니가 있었는데 언니의 도움을 받기로 하였습니다. 그날은 비가 주룩주룩오는 가운데 아이들 책가방속에다 책하고 입을 옷 한두가지씩만 챙겨나와 누가볼까 우산 푹 내려쓰고 멍든 얼굴 상처보일까 모자 눌러쓰고 우리아이들 학교 옆에 새로 생긴 여성센터가 있습니다. 아는 언니한테 전화해서 지금 집을 나왔으니 언니보고 여성센터에 전화해서 지금 급하니 4명에 식구가 갈 곳이 없어 이쪽으로 가라고 했으니 문열어 놓으라고 했답니다. 정말이지 누가볼까 그 사람이 따라올까 코고는 소리는 들었지만 너무 불안했습니다. 그래도 언니가 망을 봐주고 우리는 무사히 여성센터로 들어갔습니다.

  여성센터 직원들이 너무 친절하게 자기 일들처럼 아이들한테도 안심시켜주고 말을 계속 걸면서 여기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배고프지 않니, 잠도 못잔 것 같으니 방으로 안내해 주면서 자기네가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게 알아봐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동안에 눈좀 부치고 진통제와 파스를 갖다 부쳐주고 제가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정말이지 우리식구 찾지 못하는 곳으로 멀리 알아봐 달라고 저는 애원을 했지요. 그랬더니 저희가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다고 하시면서 일단은 누구도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말고 최대한 빠르게 알아볼테니 아이들하고 쉬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한 2~3시간 흐른뒤 서울에 깨끗하고 원장님도 너무 좋으신 곳이 있으니 그쪽으로 가서 있으라고 하시면서 현관 입구에 차를 바짝대고 한사람은 밖에 망을 보고 우리는 재빨리 차에 올라타서 온 곳이 성가원이였습니다.

  저희 가족이 모두 불안에 떨고 있는 모습을 본 성가원 직원들은 제가 너무 아파보이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저희 네식구가 살방을 안내해 주셨습니다. 그때서야 저는 이제는 살았다는 생각에 푹 주저앉아 눈물만 하염없이 흐르는데 우리아이들의 눈에 눈물들이 다 글썽거리는 모습을 보고 내가 울면 안되겠다하면서 그래도 열 개 방 중 제일 큰방을 주셨다고 하시면서 마음 푹 내려놓고 아이들 문제, 제 문제 등을 차근차근하게 해결해 주시겠다고 하면서 여기서 먹고 자고 다 생활할 수 있게끔 해주시고 아이들도 비밀전학까지 다해주신다고 하면서 엄마가 빨리 병원치료하면서 빨리 나을 수 있게끔 해주시는데 그때부터 정신 바짝차리고 두달동안 밖에 생활 못하고 독서치료, 음악치료, 미술치료 등 변호사님께도 저희들이 살 수 있는 방안도 알려 주셨습니다.

  제가 신장을 다쳐서 조금만 힘들어도 몸이 붓고 피로를 금방느껴 누워야 하는 그러한 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달째 되는날 바로 여성센터 다니면서 취업알선 교육을 받고 거기서 산후도우미 민간자격증과 수료증을 받고나서 너무 좋아 같이지내는 식구들한테 소개해주어서 교육받고 취업도하고 새로운 삶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성가원 원장님께서 어느날 저를 부르시더니 응암동에 있는 흰돌회라는 곳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저는 흰돌회에 찾아가서 원장님하고 상담을 하였는데 조건이 너무 좋았습니다. 집집마다 원룸식으로 되어 있었고 2년동안 머물면서 쌀과 반찬을 다해서 주고 아이들이 학교 갔다오면 공부방에서 공부도 봐주신다고 하시면서 여기 살면서 떠돌이 생활 하지 않게끔 최대한 열심히 일해서 적금 붓고 청약저축 가입하고 놀고 먹는 것은 용납이 안되니 일자리 빨리 알아봐서 하루빨리 직장을 다니라고 하셨습니다. 몇일 걸리니 선생님들끼리 의논을 해서 심사를 거쳐 저희는 흰돌회쪽으로 결정이 되어 이사를 했고 이사한 동시에 성가원에 있는 선생님께서 애란원이라는 곳에서 사람을 구하니 이력서를 내보라고 하셔서 넣었는데 이틀만에 애란원이라는 곳에 취업이 되었습니다. 비록 월급은 너무 적지만 그래도 나처럼 힘들게 살아가는 미혼모 시설이라 봉사하는 마음으로 저도 아이들이 4명이나 키워봤고 내가 정말 사랑을 듬뿍주면서 애기들 돌보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먹고 자는 것은 다 해결되었지만 월급쟁이 생활은 처음해보는 것이라 100만원이라는 돈을 어떻게든 쪼개어서 우리 막내 유치원비 다달이 12만원에 청약저축 13만원, 우리 아이들 아프면 걱정되어 실비보험 6만원, 그나머지는 제 교통비 6만원, 그리고 나머지는 최대한 아껴서 아이들 준비물 챙겨줄 돈, 그 나머지는 무조건 저금을 했습니다. 첫달, 두 번째달은 유치원입학비에다 살림이 아무것도 없다보니 최대한 교회분들이 다 도와주고 아는 동생이 챙겨다 주고 하는데도 또 조금씩 필요한 것 사다보니 많이 못했지만은 그래도 저 나름대로 남들한테 손 안벌리고 제 이름으로 통장을 못만든다고 하니까 원장님께서 원장님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 주셨고 저는 열심히 월금 탈때마다 최대한 열심히 넣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아이 아플때도 있고 소풍갈 때, 견학갈 때, 최대한 절약해서 쓰고 내가 아프거나 무슨 일이 생겨도 저금한 돈이 있으니 이렇게 뿌듯하고 마음이 안정 될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살다보면 한 곳에 정착할 수 있는 임대전셋집이라도 갈 수 있는 여건도 만들어 주신다고 하시니 우리 아이들한테도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우리는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다 사면은 집도 없고 계속 떠돌이 생활을 계속해야 하는 처지가 되니 너희들도 학원을 못보내주니 열심히 공부하고 혹시라도 용돈이 생기면은 저금하고 용돈 기입장에다 꼭 쓰고 엄마도 열심히 살테니까 엄마 소망과 너희들이 마음놓고 살 수 있는 그런 날이 꼭 돌아올거니까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는 우리식구가 되자고 항상 기도하면서 교육시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다보면 좋은 날이 꼭 있으리라 믿고 어릴적부터 100원짜리가 있어도 저금통에 넣는 습관과 용돈기입장에 기재하면서 저도 수첩에 기재하는 습관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온지 벌써 11개월째, 정말 많이 힘들었지만 정말 많이 노력해서 희망이 보이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뿌듯하고 나혼자서도 아이들 셋 키우면서 저금할 수 있게끔 도와주시는 우리 흰돌회 식구들한테도 너무 감사하며 꾸준하게 저금하며 헛된 삶이 아닌 진정으로 여자 한사람으로서, 엄마로서, 가장으로서 힘차게 일어설 수 있게끔 노력하고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겠습니다.

  항상 우리 아이들한테도 내가 없으면 안된다는 것 가르쳐주고 좋은 습관 저축하는 사람,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과 제가 여러 사람한테 받은 좋은 경험을 토대로 우리 아이들도 저도 남을 위해 봉사활동 하면서 베풀어가면서 또 조금씩이라도 후원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꼭 그렇게 교육시키면서 책임을 다하는 아이들로 자라게 노력하겠습니다. 역시 저금하는 생활은 마음을 여유롭게 행복하게 걱정을 덜어주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쭉~ 파이팅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머물러 있지 않겠습니다. 도와주세요.

 

새로운 목표가 생겼습니다.

 

시립비전트레이닝센터

정OO(남, 36세)

 

  저는 77년 서울 종로구 수임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제가 돌이 지날 무렵 부모님께서 이혼하여 각자 재혼하시게 되면서 어린 저를 홀 할머니에게 맡기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님 얼굴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할머니와 단둘이 살게 되면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부모님과 함께 손잡고 다니는 걸 보면 많이 부러웠으며 혼자서 많이 울곤 하였습니다. 한번은 할머니께 부모님 보고 싶다고 많이 재촉한 기억이 납니다. 그러자 할머니께서는 아버지는 거제도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셨고 어머니도 마찬가지로 캐나다에서 새로운 가족들과 함께 살기 때문에 만날 수 없다며 찾아가지도 말고 알려고도 하지 말라고 하셨었습니다. 그리곤 부모님 이야기는 일절 해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저는 망우국민학교와 봉화중학교를 거쳐 면목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친구와 어울리는 대신 공부하기를 좋아했던 저는 96년도에 광운대학교 전자공학과에 합격했습니다. 합격했을 때 정말 기뻐하시던 할머니 얼굴이 떠오릅니다.

  대학진학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제가 대학을 가는 바람에 대학등록금이라는 큰 짐이 우리 두 조손을 위협하였습니다. 어떻게든 학비를 마련해보려고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뜻 밖에 일이 제게 찾아왔습니다. 평소 몸이 약해서 항상 숨찼었는데 그날은 정말 숨쉬기가 힘들어 쓰러졌습니다. 정신을 차리니 병원 응급실이었으며 뜻 밖에 제가 폐기종을 앓고 있다고 진단 받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생각할 여력도 없이 폐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 받은 후 더 이상 근로할 수가 없는 상황에서 할머니가 버시는 돈으로 생활할 수 없어 여러 곳에서 생활비 대출을 받았습니다. 그 때 1년 가까이 약 1500만원을 받았었는데 그게 지금 와서 신용불량자 및 7000만원이라는 빚으로 제게 남게 될 줄을 그 당시 생각도 못했습니다.

  99년 할머니께서 골수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정말 힘들었습니다. 삶에 의욕을 잃고 죽을 생각에 15층 건물 옥상 난간에 올라 뛰어내리려고 했습니다. 죽으면 이 구질구질한 내 인생도 끝나고 내 마음도 편안해지겠지라는 생각으로 자살하려는 찰나 갑자기 저를 버린 부모님이 생각이 나면서 분노가 차올랐습니다. 죽기 전에 날 이렇게 만든 부모님에게 복수하고 싶은 생각이 나서 사방곳곳을 수소문해서 어머니 연락처를 찾아 전화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어머니 목소리를 들으니 눈물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라 마냥 울기만 하였습니다. 어머니 역시 울고 계셨습니다. 뜻 밖에도 캐나다에 계신 어머니가 한국으로 귀국하셔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저는 태어나 처음으로 어머니와 3달간 함께 생활했습니다. 정말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캐나다에 가족이 있으신 어머니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며 또 다시 저를 두고 캐나다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또 다시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울지 않고 혼자 떳떳하게 잘 살아보겠다는 마음을 잡고 가장 먼저 저는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을 처분하고 고시원에 입주한 후 물류창고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습니다. 그렇게 저는 홀로 작은 생명의 불씨를 피고 있었으나 사기꾼(일자리 브로커)에게 속아 보증금과 번 돈 400만원을 빼앗기고 나자 내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고 원망스러웠습니다. 이제 더 이상 살 의미를 버리고 공중화장실에서 운동화 끈으로 목을 매 자살을 시도 했습니다. 저승이길 바랬으나 깨어보니 차가운 화장실 바닥 이였습니다. 운동화 끈이 제 생명줄 보다 질기지 못한 게 원인이였습니다.  죽지 못할 바에 차라리 감옥에 가는 게 좋을 거 같아 무작정 파출소에 찾아갔습니다. 경찰 분들이 친절하시게 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켜 주셔 치료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제 악몽같았던 청년기를 보냈습니다. “올해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새해가 시작되고 개인면담 시간이 돌아왔을 때, 담당 사회 복지사가 내게 물었습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운전면허증과 신용회복이 목표라고 대답했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그것이 실현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두려웠고 아무 희망이 없었으며 운전을 해볼 생각도 빚을 갚을 생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작년 4월 이곳 비전트레이닝 센터에 입소한지 벌써 1년 반이 넘었습니다. 그때 저는 충동적인 자살시도로 인해 국립서울병원(남들이 말하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할 때 이곳을 소개받아서 들어왔습니다. 그때 저는  아무 의욕도 희망도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았습니다. 이대로 있다가 몸을 추슬러서 나가면 또 되는대로 살겠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곳 비전트레이닝센터에서는 4주간의 새내기 교육프로그램을 이수하면 구직을 지원해주게 됩니다. 4주간에 새내기 교육프로그램을 받는 동안 이 세상에 나혼자가 아닌 가족과 같은 동료들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대인관계가 좋아졌으며 허약한 몸을 단련하여 건강한 체격을 얻을수 있다는 사실과 낮아진 자존감을 향상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교육을 마치자 저에게 ‘아름다운가게’라는 생소한 직장을 소개시켜줬습니다. 평소엔 이런 곳이 있는지도 몰랐던 곳. 서울시에서 지원하는 비영리 추구의 사회적 기업. 이정도가 소개시켜준 분의 설명이었습니다. 저는 단지, 직장이 바로 옆이라는 것과 돈을 목적으로 그곳에 출근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여를 일했을 때 문득, 데스크에 놓여진 책을 보았습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그 책을 보았을 때 든 생각은 그냥 예전기억에 오래된 책 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몇 년도에 내가 무얼 하고 있었지? 그런 정도의 생각정도. 저는 책과는 담쌓은 독서라고는 교과서외엔 일생 몇 권 읽어보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책은 생각보다 얇았고, 우연히 남는 시간 할 일도 없으니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읽고 느낀 점은 세상의 간단한 이치. 살아남으려는 자는 변화에 대처하고 적응하기를 무서워하지 말아야 한다. 이거였습니다. 간단한 이론. 왜 이걸 몰랐을까? 아니 알고 있었으면서도 왜 몸으로 행하지 않았을까? 제가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애초에 알고 있었으면서도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 그냥 이대로 안주하기에 만족하는 사람...

  이 책에서 말하고자하는 바가 제가 느꼈던 점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그 후로 아주 조금은 변화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 번에 크게 바뀌진 않았을지라도, 변화에 우선 두려운 마음보다는 조금 먼저 대처하는 마음가짐. 그리고 그 후 갖게된 자신감. 변화에 어떻게 지혜롭게 대처할지는 아직 잘 몰라도, 두려워서 그냥 시간만 보내는 경우는 없어졌습니다.

  다행히 직장생활은 순조로웠습니다. 아직은 힘쓰기에 괜찮은 젊은 나이에, 붙임성있게 대해주는 직장 분들과 일을 하다보니 ‘어딘가에 나를 필요로 하는 곳도 있구나’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나름대로 일도 열심히 했습니다. 담당 사회복지사가 권하는 적금이나 청약통장도 만들어서 돈도 모으기 시작했고, 올해 8월엔 만기가 되어서 찾기도 했습니다. 1년짜리 적금이고, 이자도 거의 없다시피하지만, 만기가 돼서 찾을때의 느낌은 달랐습니다. 단순히 돈을 모은게 아니라 마음을 다 잡은 것이었습니다.

  서울시에서 제공하는 자격증취득지원으로 운전 면허증도 얼마전에 발급받았습니다. 무언가 하나씩 이루어간다라는 느낌은 글로 표현이 안 되는군요.

  나의 구체적인 장래계획은 아직 없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없는 것이 아니라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며, 그 기회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 나의 목표입니다.

 한 달 월급 90여만원 그중 80만원 정도를 저축과 신용회복에 사용하고 1년 반을 모아서 1200만원 정도를 모았습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적은 돈이겠지만, 저에게는 소중한 금액입니다. 이 모은 돈으로 내년에 남아있는 빚도 다 갚을 생각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목표입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지금의 일자리에서 인정받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입니다.

지금 제가 일하고 있는 곳은 아름다운 가게입니다. 여기는 쉽게 말해 기증자 분이 쓰지는 않지만, 상품가치가 있는 물건을 기증받아 재판매하여 자원을 순환시키며, 판매 수익금으로 어려운 이웃을 지원하여 나눔과 순환을 실천하는 사회적 기업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일하는 곳은 용답동에 위치한 생산센터입니다. 여기서 생산한 상품을 서울 인근 각 매장에 보내는 업무까지가 제 일입니다. 이곳에서는 요즘 단기계약직으로 일하는 사람을 일정 시간동안 근무 후 평가하여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여기서 인정을 받아 정규직으로 전환, 자활, 자립하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임대주택을 얻어 자립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1-2년 정도 이렇게 열심히 생활하면 임대주택도 가능하다고 담당자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청약저축과 적금도 꾸준히 부어서, 자립할 주거공간을 갖는게 목표입니다.

   물론, 예전에 더 열심히 살았더라면 하는 후회는 언제나 합니다. 그러나 이제 저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현재의 마음을 흔들리지 않고 잡고 가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곧 2013년 1월이 다가 옵니다. 저에게는 사회 복지사와의 새해면담에서 말해줄 올해의 목표가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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