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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기감영은 왜 한성부에 있었을까?서울역사편찬원, 연구서 발간

담당부서
서울역사편찬원
문의
413-9522
수정일
2019.11.29

□ 서울역사편찬원에서는 ‘서울 역사의 취약 분야’를 보강하고 서울 연구자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서울역사 중점연구’ 발간 사업을 2016년도부터 시작하였다. 올해는 조선시대 성저십리와 경기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 서울역사 중점연구 제6권은 조선시대 ‘경기’를 다룬 종합 연구서인 <조선시대 ‘경기’ 연구>다.

○ 이 책에는 총 7편의 논문이 수록되어있는데, 조선시대 경기 재편과 위상의 변화, 조선시대 ‘경기’ 지역 목장 연구, 조선시대 경기감영의 설치와 변화, 조선 후기 서울-‘경기’ 지역의 성장과 물류유통구조, 조선시대 ‘경기’의 육로 교통, 조선 후기 ‘경기’의 왕릉체계, 조선시대 한강의 진도체계와 진선관리 등이다.

□ 먼저 ‘조선시대 경기 재편과 위상의 변화’는 경기라는 공간의 구성변화와 그 위상에 대해 살펴본 글이다.

○ 고려시대 존재한 경기라는 개념은 조선 초기까지 이어지면서 한양 주변을 지칭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내내 경기의 공간 영역은 유지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경기의 일정 지역이 특수화되었다.

○ 한편 경기의 공간은 거점을 중심으로 몇 개의 영역으로 편제되기 시작했다. 지역 방위 체제를 의미하는 진관체제가 점차 변화하면서 몇 개 거점을 중심으로 진관 구역이 고착화되었다.

□ ‘조선시대 ‘경기’ 지역 목장 연구’는 경기 지역에 설치된 목장의 의미를 추적했다.

○ 국가 운영에서 말이 가지는 중요한 위상 때문에 조선은 건국 직후에 ‘경기’ 지역에 목장을 설치하여 말의 수급에 관심을 기울였다.

○ 대부분의 ‘경기’ 지역 목장은 오래되지 않아 폐지되었지만 한양과 양주에 걸쳐 세워진 전곶 목장은 몇 차례 폐지를 거치면서 끝까지 살아남았다. 이후 경기 지역 목장은 목장이 아닌 점차 거주지로 변모하였다.

□ ‘조선시대 경기감영의 설치와 변화’는 경기감영이 도성 내 위치하게 된 의미를 살펴보았다.

○ 경기감영이 한성부 반송방에 위치한 이유는 조선의 국왕이 도성 주위를 감싸는 경기의 수장, 경기감찰사의 지속적인 도움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 경기관찰사는 경기를 맡아 관할하면서 도성을 지원하는 여러 업무를 수행하였는데, 특히 왕릉 관련 하여 국왕의 행차에 지속적 도움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국왕은 지방의 농사 형편이나 제도의 시행여부를 파악할 때 첫 번째 기준을 경기로 삼아 경기관찰사를 자주 불러들여 상황을 물어보았다.

□ ‘조선 후기 서울-’경기‘ 지역의 성장과 물류유통구조’는 조선 후기 새롭게 형성된 경제 구조 속에서 경기 지역이 가지는 물류 공간의 의미를 추적했다.

○ 조선 초기 ‘경기’ 지역은 왕실을 부양하고 정부 관서의 경비를 조달하는 물적 토대로서 그 위상을 재구축했다.

○ 또한 이 지역은 서울로 인구와 물자가 이동하는 교통의 요지로, 왕성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국가적 물류의 유통을 핵심으로 하는 공간이었다.

□ ‘조선시대 ‘경기’의 육로교통’은 ‘경기’ 지역에 설치된 역원 등 교통거점을 중심으로 이 지역에 설치된 교통로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 ‘경기’지역에 위치한 逆道(전국의 교통역과 역로망)에는 일찍부터 중앙의 경관이었던 ‘察訪’(조선시대 각 도의 역참일을 맡아보던 외직 관리)이 파견되었고 영서역과 양재역은 중앙의 직접 관리 대상이 되었다.

○ 역이외에도 院, 津渡 등 다수의 교통 거점이 이 지역에 분포하였는데, 院은 교통로상 위치한 공공 편의시설로 역과 역사이에서 교통로를 잇는 중요한 지점이다.

□ ‘조선 후기 ‘경기’의 왕릉과 관리체계’는 조선시대 경기 즉, 현재의 서울 경내로 포함된 당대의 경기에 소속된 지역의 왕릉 현황을 파악하고, 역할과 관리실태를 파악하였다.

○ 이 지역에 분포된 왕릉은 모두 8개로 관리를 위해 매년 정해진 일자 혹은 사안이 발생했을 때 제향을 올렸다.

○ 이들 왕릉은 도성과 너무 가까워도 안되었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안되었다. 이는 도성에 가까우면 도성의 발전을 저해할 여지가 있었고, 너무 멀면 관리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 ‘조선시대 한강의 진도체계와 진도 관리’는 조선시대 한강의 진도 관리 체계와 진도의 변화상을 시계열적으로 분석하였다.

○ 1414년 임진도, 양화도, 한강도 외에 민간인이 임의로 통행했던 한강의 노도, 광진, 용진 등의 津渡(나루)를 정부가 관장하여 국경을 지키는 지점으로 활용하였다.

○ 조선 전기에는 도승(조선시대 한강변에 설치한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진(津)·도의 관리책임자)을 두어 관리했고, 17세기 병자호란 이후 강화도와 남한산성이 설치되면서 진도체제는 계속 변화하였다.

□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조선시대 ‘경기’ 연구>는 서울 소재 공공도서관 등에 무상으로 배포되어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며, 구입을 원할 경우 신청사 시민청의 서울책방에서도 구매할 수 있다. 책값은 1만 원이다.

□ 이상배 서울역사편찬원장은 이 책의 발간을 계기로 “그간 공간 영역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연구되지 않았던 조선시대 ‘경기’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기를 바란다.”라며 “앞으로도 더 좋은 ≪서울역사 중점연구총서≫를 발간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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