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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불명 연복사탑중창비, 시민 제보로 행방 찾아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 추진

수정일2013-04-02

 

 

 

 

 

 

 

 

 

 

 

 

- 일제강점기 제자리 잃고 이전된 실향 문화재 <개성 연복사탑중창비>시민 제보로 행방을 찾아

- 역사적 사실과 조선시대 새로운 조형의 석비예술을 예고하는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 3.21(목)부터 30일간의 예고를 통해 서울시의 문화재로 지정될 예정

 

□ 그간 학계에 소재 불명으로 알려져왔던 연복사탑중창비가 시민의 제보로 그 행방을 찾고, 서울시의 문화재로 지정될 예정이다.

 

□ 연복사탑중창비(演福寺塔重創碑)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공덕으로 다시 세워진 연복사 오층불탑(목탑)의 건립내력을 담은 비석이다. 1394년에 세워진 연복사탑중창비의 비신(碑身) 부분은 망실되었으나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부분만은 온전하게 옛 절터에 남겨졌었다. 이 유서깊은 비석은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이 본격화하던 100여 년 전 무렵에 서울 용산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 소재불명의 연복사탑중창비를 찾기까지 >

 

□ 연복사탑중창비는 최근까지도 서울 용산으로 옮겨졌다는 간략한 사실만 학계에서 파악되고 있었을 뿐 정확한 소재지가 미처 확인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 소재불명이었던 연복사탑중창비의 행방을 찾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초석을 마련한 이는 일제강점기 동안 여기 저기 흩어진 우리 문화재 찾기에 힘을 기울여 연구해왔던 이순우 씨이다.

 

□ 이순우씨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여기저기로 흩어진 우리 문화재(특히 석조유물)의 원위치 및 소재지 찾기에 힘을 기울이며 관련 저서를 발간해왔다. 연복사탑중창비의 행방을 찾는 일도 그의 주요한 관심사여서, 연복사탑중창비의 소재지와 관련한 몇 건의 자료를 인터넷 카페 ‘일그러진 근대 역사의 흔적에 게재하였다.

 

□ 이러한 노력은 2012년 2월 24일에 큰 결실을 맺게 되었다. 2012년 2월 24일에 카페회원인 김석중씨가 우연히 길을 가다 연복사탑중창비를 발견하였다는 글을 올렸다. 이로써 그간 행방이 묘연했던 연복사탑중창비가 세상에 다시 알려졌다. 한 시민의 눈썰미가 제자리 잃은 문화재의 행방을 찾고 드디어 그 가치를 밝히게 된 것이다.

 

<개성의 대찰 연복사와 연복사탑중창비 >

 

□ 연복사(演福寺)는 고려시대에 개경에 있던 대찰로서, 도성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찰의 규모는 천여 칸이 넘었으며, 사찰 안에 세 개의 연못과 아홉 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 연복사의 남쪽에는 풍수설에 의해 5층의 목탑을 세웠는데 연복사탑의 규모에 관하여는 우뚝 선 5층 누각이 온 성중을 압도하고 있는 창문과 기왓장에 저녁놀이 비친다고 표현한 유호인의 명산답사기에서도 그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 조선 태조 이성계에 의해 다시 세워졌던 개성의 연복사탑은 1563년(명종 18년)에 소실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차천로(車天輅, 1556~1615)의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이 저술한 『해동역사(海東繹史)』의 기록에 따르면 연복사탑의 중창내력을 담은 연복사탑중창비는 조선 후기까지도 원형대로 잘 남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연복사탑중창비의 존재가 다시 확인된 때는 1910년 9월의 일이다. 그 당시 일본 동경제대 건축과의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1867~1935) 교수 일행이 고적조사에 막 착수하던 차에, 그 무렵 서울 용산으로 막 옮겨진 연복사탑중창비를 포착함으로써 그들의 조사목록에 이 비석의 존재가 처음 채록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촬영된 사진 속 연복사탑중창비 는 비신(碑身)이 없이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개성의 연복사탑중창비가 용산 철도회관 앞 화단에 있는 이유 >

 

 

□ 개성에 있던 연복사탑중창비는 어떻게 용산철도회관 앞 화단에 자리잡게 되었을까?

 

□ 경기도 개성의 남대문 밖 남산동(南山洞) 및 한천동(寒泉洞)에 있던 연복사는 경의선 철로가 지나는 구역과 맞물려 있고 개성역(開城驛)과도 상당히 인접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연복사탑중창비 또한 경의선 부설과 관련하여 오늘날 용산구 한강로 3가 65번지 일대에 있던 용산 철도구락부로 이전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철도구락부(鐵道俱樂部)는 현재 용산공업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옛 철도병원(현 중앙대학교 용산병원) 쪽에 걸쳐 있는 구역(한강로 3가 65번지 일대)에 자리하였다.

 

“철도구락부는 철도창설 초기에 각 지역마다 편의대로 생겨난 조직으로, 1919년 4월에 용산의 철도청 년회와 철도구락부가 해산하는 동시에 사우회(社友會)가 새로 결성되었으며, 1925년 철도의 총독부 직 영전환과 더불어 다시 국우회(局友會)로 명칭이 변경되었는데, 각 지부 아래 구락부가 설치되었다”

조선총독부 철도국, 『조선철도사십년약사(朝鮮鐵道四十年略史)』 (1940)

 

□ 해방 이후 1952년에 용산철도구락부가 있던 곳에는 항공대학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 학교는 1961년 무렵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40번지(구 교통부 시설국 청사)로 이전되었는데, 연복사탑중창비도 다시 옮겨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용산역 민자역사 신축공사 과정에서 현 위치인 철도회관(용산구 한강로 3가 40-1010) 화단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연복사탑중창비의 문화재적 가치>

 

□ 연복사탑중창비는 조선의 건국과 함께 새로이 수용되는 중국 명(明)대의 석비 조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귀부의 표현 자체가 매우 상징적이고 이수 부분도 중국 전통을 따라 반원형의 비신 상부에 오각형의 제액을 내고 그 주위를 여러 마리의 용이 휘감는 형상을 하고 있다.

 

□ 이와 같은 비신(碑身) 상부 이수 부분의 조형이 중국식으로 바뀌는 것은 이미 고려 우왕 3년(1377)에 조성된 양주 회암사 선각왕사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비좌 부분인 귀부까지 중국식으로 바뀌는 것은 이 비가 가장 앞서는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 이와 같이 연복사 오층탑 중창의 역사적 사실을 제시하는 한편 중국식 석비 양식 수용으로 새로운 조형의 조선시대 석비예술을 예고하는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 서울시는 2012년 9월부터 코레일과 보존방안을 협의하는 한편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조사와 사전심의를 통해 문화재 지정가치를 확인하고 이번에 문화재 지정계획을 3월 21일(목)부터 30일 동안 예고하게 되었다. 예고기간 중 각계 의견 수렴을 거치고 올 4월 문화재 위원회의 2차 심의를 마친 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최종고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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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부서 문화관광디자인본부 - 역사문화재과
  • 문의 2133-2641
  • 작성일 2013-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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