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서울올림픽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80년대 서울이야기
- 서울역사박물관, 7월 28일부터 10월 14일까지 <88 올림픽과 서울> 특별전 열어
- 서울올림픽 유치 과정, 정부·서울시 문서자료를 통해 본 극적 반전의 역사
‣역사의 현장을 직접 발로 뛴 관계자들의 기증 자료가 전하는 생생한 증언
- 88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박차를 가하는 서울 도시발전사 집중 조명
‣잠실의 올림픽타운화, 한강의 공원화, 지하철 2·3·4호선 건설 등 도시 공간 집중 개발
- 88 서울올림픽과 80년대를 특징짓는 새로운 생활문화 변화상 소개
‣민주화 열기 속 격동의 80년대, 프로스포츠시대 개막, 경제 호황에 힘입은 대중소비문화 성장
- 마이카시대, 가전제품 보급률 급상승, 해외여행 자유화, 야간 통행금지 해제 등
서울역사박물관(관장 송인호)에서는 88 서울올림픽대회 개최 30주년을 맞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변화되는 서울의 반세기 역사를 회고하는 <88 올림픽과 서울> 특별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88 올림픽 당시 의전용으로 실제 사용된 일명 ‘사마란치 콤비버스’와 김용래 전 서울시장, 이동 전 서울시립대학교 총장 등 올림픽 관계자들이 박물관에 기증한 다수의 올림픽 관련 자료 등 유물 300여 점, 영상, 그래픽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현장감, 시대감을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하였다.
1981년 9월 30일, 제24회 올림픽 개최도시로 서울이 선정된 것은 서울 도시발전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80년대에는 86 서울아시아경기대회와 88 서울장애자올림픽대회까지 대규모 국제대회가 연이어 개최되었다. 이 대회들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서울도시계획은 ‘올림픽 대비’라는 특수한 목표를 설정하고 대규모 개발을 통한 체육시설과 도시기반시설 우선 확충 및 시민의 생활문화를 개선하는데 총력을 다하였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라는 88 서울올림픽의 표어처럼 이는 서울이 마주한 시대적 도전이었다.
<88 올림픽과 서울> 특별전은 올림픽 도전의 첫 발을 내디딘 1979년 10월의 ‘제24회 올림픽 유치 계획’ 공식 발표로부터 1988년 서울올림픽과 서울장애자올림픽의 성공적인 마무리까지 10년의 기간을 통해, 이 기간 동안 서울의 도시공간과 도시민들의 생활상 변화가 서로 유기적으로 상호 작용하며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전시의 구성은 <1부. 1988, 올림픽과 서울>, <2부. 88 올림픽과 서울의 공간 변화> <3부. 올림픽과 80년대 서울 문화> 등 크게 3개의 주제로 나뉜다.
1부. 1988, 올림픽과 서울 - 국제사회로 도약하기 위한 시대적 도전
올림픽 유치는 우리나라가 국제사회로 도약하기 위한 시대적 도전이었다. 유치 과정에서 국내의 불안한 상황과 개최도시 서울시의 재정 문제 등으로 수차례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올림픽 불가론’이 우세한 가운데 전두환 대통령의 올림픽 유치 최종 결정으로, 경쟁도시 나고야와의 사활을 건 외교 전쟁 끝에 결국 올림픽 개최국이 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스포츠 역사가 아닌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써 서울올림픽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고자 했다.
한국은 이미 1966년 `70 아시안게임 서울 유치로 국제사회에 첫 도전을 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의 불안한 상황과 기반 시설·재정 부족의 이유로 1968년 대회 개최권을 반납하게 된다. 이 불명예스런운 경험은 국제 대회를 치를 수 있는 기반 시설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9년 10월 8일 정상천 서울시장의 올림픽 유치 공식 발표 후 뒤이어 10.26 사태와 12.12 사태가 연이어 일어나면서 유치 계획은 소강상태에 빠진다.
전두환 대통령의 올림픽 유치 재추진 지시에 서울시는 재정적인 문제로 ‘개최 능력 없음’을 통보하지만, 올림픽 유치는 강행되었다.
1980년대는 86 아시아경기대회, 88 서울올림픽대회, 88 서울장애자올림픽대회 등 대규모의 국제 대회들이 연이어 개최되었고, 5공화국의 스포츠 육성 정책과 맞물려 스포츠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86 제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1986. 9. 20 ~ 10. 5)는 27개국 4,839명의 선수가 참가하였고, 한국은 종합 2위의 성적을 얻었다. 86 아시안게임의 대회 운영 기술과 경험은 88 서울 올림픽의 성공에 확신을 주었으며, 국제대회의 시험무대로써의 역할을 다하였다.
`88 제24회 서울하계올림픽대회(1988. 9. 17 ~ 10. 2)는 16년 만에 동서 양 진영이 대부분 참가한 160개국 13,304명 참여로, 올림픽 역사상 최다 국가가 함께한 화합의 행사가 되었다. 한국은 종합 4위의 성적을 얻으며, 분단과 전쟁의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룬 국제적 도시로서 도약하였다.
`88 서울장애자올림픽대회(1988. 10. 15 ~ 10. 24)는 앞선 서울올림픽의 운영시스템, 물자, 시설, 인력 등을 대부분 지원받아 패럴림픽 사상 최대 규모로 치러졌다. 올림픽 개최지에서 올림픽 시설을 활용하기 시작한 첫 번째 패럴림픽이자 성화 봉송을 최초로 시작한 대회였다. 한국은 종합 7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주요 유물은 올림픽 유치 및 개최를 주도했던 정부와 서울시의 공식·비공식 문서, 1981년 독일(서독) 바덴바덴 IOC총회 현장에서 재무 담당을 맡았던 전 서울시립대학교 이동(李棟) 총장의 기증자료, 1988년 서울시장과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던 김용래 전 서울시장의 기증자료가 전시되며, 올림픽 유치 확정 후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Juan Antonio Samaranch) IOC위원장 내한 당시 공식 의전 차량인 콤비버스가 야외에 전시된다.
2018년에 신규 수증된 이동 전 서울시립대학교 총장 기증 자료(이창 기증) 중 올림픽 관련 자료로 정상천 서울시장의 <올림픽 유치 계획 기자회견 발표문>, IOC총회 영문 연설문, 박영수 시장의 귀국 기자회견 시 발표한 육필원고 소감문 등이 전시된다.
올림픽 공식 발표 이후 올림픽 준비에 힘쓴 서울시장은 모두 5명이다. 그중 김용래 전 서울시장은 올림픽을 치르던 1988년 1년 동안 서울시장과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며 서울올림픽과 서울장애자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2016년 서울역사박물관에 2,000여 점 기증된 자료(김환석 기증) 중 올림픽 관련 자료만 엄선하여 약 50여 점 정도가 전시된다.
콤비버스는 1987년 ㈜아시아자동차에서 제작된 올림픽 의전용 차량이다. 사마란치 IOC위원장, 대회조직위원장, 각 국제 경기연맹 회장 등 국내외의 많은 귀빈들이 서울과 지방의 각 경기장 및 행사장을 직접 순회하면서 대회 준비부터 종료시까지 탑승했던 차량이다.
2부. 88 올림픽과 서울의 공간 변화 – ‘올림픽 대비’ 도시공간 개조사업
70 아시안게임 반납을 계기로 강남 개발에는 국제 스포츠대회를 고려한 도시설계 개념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부터 잠실지구 개발로 ‘올림픽타운’의 기반을 다졌고, 지금의 송파구 방이동의 몽촌토성 일대는 역사성과 체육·문화를 주제로 한 대단위 체육공원이 조성되었다. 한강은 종합개발사업으로 시민공원 조성, 수질 개선 등을 통해 휴식과 여가의 공간으로 정비되어 서울의 중심이 되었다. 주요 경기 시설과 도심 지역 간의 연결성을 강화하기 위해 간선도로, 교량, 지하철 2·3·4호선 등 도시 네트워크도 확장되었다. 올림픽 대비를 위한 도시개발은 서울 도심내 불량주택지구개발도 포함한다. 불량주택 철거 과정에서 정착민들의 주거권 박탈과 폭력적 철거가 원인이 되어 도시철거민투쟁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잠실은 조선 초기 국립 양잠소인 잠실도회(蠶室都會)가 설치되었던 곳으로, 뽕나무가 무성하던 한강의 섬 가운데 하나였다. 1971년 공유수면 매립사업과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새로운 시가지로 개발되었고, 국제 대회 개최를 위한 종합경기장, 아파트단지, 상업시설이 들어서 잠실은 ‘또 다른 강남’으로 급부상하였다.
또한 방이동 일대는 1982년 ‘86 아시아, 88 올림픽대회 총합계획’과 함께 세부적인 건설 방안이 확정되어 체육시설뿐만 아니라 체육학교, 공원, 몽촌토성과 야외 공연장 등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체육문화시설단지인 올림픽공원으로 조성되었다.
한강은 1982~1986년에 추진된 ‘한강종합개발계획’으로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다. 서울올림픽을 통해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므로, 한강 개발을 통해 새롭게 정비된 한강과 발전된 서울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 결과 한강의 물줄기는 펴지고, 사계절 일정한 수량이 유지되었으며, 수질은 개선되어 맑은 물이 흐르게 되었다. ‘물의 공원’이라는 표현과 함께 유람선과 수상 레저·스포츠 시설 등을 즐길 수 있는 한강 둔치가 조성되었다.
1980년대에는 서울올림픽대회 대비 차원에서 주요 간선도로와 교량들을 신설하거나 확장하고, 88 서울올림픽 개최지인 강남과 잠실지구와의 연결 강화 등을 주요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1986년에는 서울의 동서를 연결하는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인 올림픽대로가 개통되었고, 동부외곽 간선도로 등 주요 간선도로가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했다. 또한 1985년 잠실, 강남, 강북을 연결하는 지하철 2호선 순환선이 건설되고, 서울을 X축으로 연결하는 3호선과 4호선도 1985년에 완공되었다.
올림픽대회 개최 시 전 세계에 보여 질 선진적인 도시 서울의 모습을 위해 도시개조사업을 착수하였다. 판자촌에 대한 대대적인 철거가 이루어졌으며 해당지역의 거주민들은 제대로 된 보상 없이 타지로 내몰려 철거반대투쟁을 시도하는 등 상당한 사회적 갈등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성화봉송로와 태릉국제사격장 인근의 상계동과 김포공항, 올림픽대로의 인근 마라톤코스에 자리하고 있던 목동이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 코너의 주요 전시물은 섬이던 잠실이 육속화(陸續化)되고 잠실종합경기장과 올림픽공원이 조성된 것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항공사진 슈퍼그래픽, 1950~60년대 한강 개발 전 생활상과 1980년대 한강종합개발사업 이후의 변화된 한강 모습을 비교해 볼 수 있는 대형 영상을 만나볼 수 있다.
3부. 올림픽과 80년대 서울 문화 - 격동의 80년대, 서울 살이의 변화
올림픽 유치가 확정된 것은 1980년 5월 민주화운동과 함께 제5공화국 군사정권이 들어선 때였다. 새 정권은 국민의 정치적 관심 환기를 위해 프로스포츠 육성, 해외여행 자유화, 야간 통행금지 해제, 교복 자율화 등 여러 가지 해금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와 더불어 1980년대 중반 ‘3저 호황’ 시기를 맞아 고도성장을 이루며 대량 소비의 시대가 열렸고, 컬러 TV 방송 등 대중매체의 발달로 가전제품 보급률이 상승하였으며, 마이카 시대 등 새롭고 개성적인 대중문화가 유행하였다.
1979년 10.26 사태로 오랜 유신체제가 막을 내렸으나 뒤이어 12.12 사태로 신군부세력이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제5공화국이 시작되었다. 1980년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6.10 민주화운동 등 국민들의 민주적 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이 격화되었던 시기였다. 정부는 국민의 관심을 분산시켜 정당성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서울이 88 서울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된 때를 전후하여 TV 컬러 방송과 프로스포츠 개시, 야간 통행금지 해제, 중고등학교 교복 자율화, 성인영화 검열 기준 완화 등의 조치를 취했다.
1980년대 대량 소비시대에 접어들면서 눈에 띠는 현상은 자동차 판매와 등록률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자동차는 대중이 소비능력을 갖춘 시대의 상징과도 같았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자동차 생산시대가 시작되고, 기아산업의 브리사와 현대의 포니 등 소형 국민차들이 출시되면서 자동차 보유 대수는 1980년대 초반까지 꾸준히 증가했다.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부터는 자동차 판매와 등록률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마이카 시대’와 ‘오너드라이버’라는 신조어를 유행시켰다. ‘자동차 문화’가 생기면서 교통체증, 교통사고 등 사회문제가 새롭게 대두되었다.
88 서울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스포츠는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고, 잇달아 프로축구, 프로씨름, 프로농구 등이 시작되면서, 프로스포츠는 국민들의 일상에 활력을 주는 중요한 볼거리로 자리 잡았다.
1980년 12월 1일 TV 컬러 방송이 시작되었다. TV 상품광고들은 색채로 사람들을 유혹하기 시작했고, 색채 영화도 VCR 테이프로 복제되었다. 바야흐로 ‘색의 시대’가 열렸다. 영상 기기와 영상 미디어 제작, 유통 산업이 특수를 누렸으며, 관련 기술도 빠르게 발전했다.
1980년대 내내 대중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사람과 시간, 공간과 매체가 모두 늘어났다. 국민 소득수준 향상, 근로시간 단축으로 자유시간이 증대되자 여가의 가치관에도 변화가 왔다. 1982년 1월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고, 같은 해 8월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되면서 여가문화는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일일 생활권이 가능해지고 정보 교류가 신속하게 이루어지면서 각종 레저스포츠와 국내 여행뿐만 아니라 해외여행도 일반화되었다.
주요 전시물은 ‘마이카 시대’의 선도적인 차종 모델인 ‘브리사(Brisa)’(서울특별시 문화본부 박물관과 소장)와 80년대 대중매체 및 각종 해금 조치 관련 공문서들이 소개된다.
기아산업(현 기아자동차)의 브리사(Brisa)는 최근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한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주인공이 타고 광주를 누비던 택시로 잘 알려져 있다.
전시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관람 시간은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 토·일·공휴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이다. 공휴일을 제외한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자세한 정보는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www.museum.seoul.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문의 02-724-0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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