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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소통하는 시민미술단체, 성동구 늦바람

2014.05.09
마을공동체담당관
전화
02-2133-6341

* 성동구 늦바람, 마을공동체 사업 참여현황 : 자체 활동

 

그림으로 소통하는 시민미술단체, 성동구 늦바람

 

늦바람 (1)

<검댕과 열아홉 개의 꽃잎>

잘 그린 그림으로 잣대를 잴 수 없는 그림이었다.

‘어떤 느낌’을 가졌느냐는 질문이 더 적합했다. 왼쪽의 그림은 무엇이 표현된 그림일까?

그림을 그린 이는 현직 소방관. 2008년 8월 20일, 은평구 대조동에서 발생한 나이트클럽 화재.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 화마가 덮친 건물 안에서, 소방관들이 죽어갔다. 안에는 동료 소방관이 있었다.

얼마나 뜨거웠을까? 불은! 얼마나 간절했을까? 물은!

소방관은 깊은 절망과 고통에 빠졌다. 그리고 그 4개월여 동안 저 그림을 그렸다.

어쩌면 이것은 그림으로 된 묘비이다.

상처가 사라질 수는 없겠지만, 공감으로 어루만져주는 힘은 창조될 수 있다.

시민미술단체 <늦바람>이 그리고자 하는 그림 또한 이런 것이다.

 

늦바람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늦게 온

가끔 질문한다. 가장 능력 있으며, 동시에 가장 선한 철인이 다스리는 세계가 있다면, 나는 그곳의 신민이 되기를 원할까? 아니면 자기를 잃지 않는, 평범한 대중들과 함께 살기를 원해야 할까?

 

1995년 2월에 <늦바람>은 처음 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일반)시민미술단체 늦바람’이 아니었다. 이름은 길고, ‘거창’했다. ‘민족통일애국청년회’ 산하의 ‘조국을 그리는 청년 그림터-늦바람’. 90년대 초가 되자 ‘민족민중미술운동연합(민미련)’에서는 ‘그림누리’가 남았고, 1994년에 서울지역 미술학생회연합(서미연)에서 활동했던 미술가들이 모인 ‘바람풀’도 결성되었다. <늦바람> 역시 ‘민주화 운동의 태풍’ 이후에 남았던 여러 대중 예술모임의 하나였다. 1997년에 <늦바람>은 민애청으로부터 독립했다. ‘민족’ ‘애국’ ‘청년’ 안에만 담기기에는 세상도, 사람도 바뀌어 있었다. 1999년에는 김윤환-김강이라는 두 명의 ‘전문 미술인’도 <늦바람>을 탈퇴했다. 이제는 일반 시민회원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실행하고, 평가하는 길이 앞에 놓여있었다. 가보지 않은 길이었다.

 

<늦바람>에 들어가면 약 3개월에 걸친 ‘시민미술수업-기초반 강좌’가 입문자를 위해 마련되어 있다. 원통과 석고상, 명암을 짚어가는 기존 수업과는 다른 길이다. 1미리미터씩 연필 전진시키기, 거꾸로 그리기, 외곽만 따라가기를 한다. 머릿속의 고정된 상을 지우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이 먼저. 마음의 눈을 떠가기 위한 ‘기술수업’이다. 자화상을 그리는 것으로 입문 코스가 마무리된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여러 번 강조되는 것은 ‘테크닉’이 아니다. 중요 한 것은 ‘기능’이거나, ‘작품’이 아님을, 그려야 할 것은 자신의 ‘삶’이거나 ‘소통’임을 차근차근 알아가는 과정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것. 이건, 듣기에는 작은 말이었지만, 그림을 크게 바꿔놓는 말이었다. 모호한 메시지였지만, 내칠 수 없는 ‘어젠다(의제)’였다. 기초반 이후엔 유화, 수채화, 아크릴 등 본인의 소재로 자유로운 주제를 그린다.

 

1늦바람 (2)늦바람 (3)

 

나를 드러내고 응시하는 그림들

늦바람은 야외스케치를 정례화하고, 대개는 1박 2일로 여행도 떠났다. 하나의 대상을 그린 뒤, 모두 모여 함께 그림들을 보았다. 평이 쏟아졌다. 거기에는 그림의 대상만이 아니라, 그린 사람들이 보였다. 어쩌면 비슷하고, 어쩌면 다른 모습들을 나도, 타인도 찾아냈다. 꼬박꼬박 미술관, 전시회에도 가고, 화가들을 불러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로 며느리로, 변호사로 건축가로 소방관으로 살 때는 잘 몰랐던 ‘어떤 진실’들이 차츰 느껴졌다. 늦바람의 붓은 그때 비로소, 자기 혼을 갖고 캔버스를 짚어나간다.

 

황정화 대표는 최근 보리밭을 그렸다. 정말 그리고자 한 것은 보리밭을 움직이는 바람이었다. 황정화씨는 초등학교 교사. 이전에는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었다. <말>지를 보다가 <늦바람> 기사를 보고 이곳을 찾았고, 대표까지 맡았다. “탁월한 지도력을 공인받았다기보다는, ‘카리스마’가 풍기는 인상 때문에” 대표를 맡았다고 했다. 2010년 이후 양충우 회원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많은 일들은 공동의 의사소통을 통해 결정된다.

 

이주연 사무국장의 그림은 근처 냉국수를 잘 마는 선술집에 걸려있다. 장마철 흙탕물이 고비를 넘는 장면이다. ‘넘어감’을 그리려고 했는가? 주연 씨는 유일한 상근직이다. 직장 생활을 하는 중에 자주자주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림이란 곧 그 사람의 느낌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사무국을 맡는 것과 연관이 있을까? 어쨌든 주연씨는 이 일이 어떤지 모르지 않지만, 일을 맡기로 했다. 1998년 때쯤의 일이었다. 어느덧 둘은 15년여의 세월을 늦바람서 보냈다.

 

그동안 <늦바람>은 매년 전시회를 열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 만의 그림을 그리도록!” 독려하지만, 동시에 대중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정례화한 것. ‘주제’를 정해 함께 하고, 동시에 ‘자유 주제’도 지속했다. 2000년에는 <자화상으로 세상을 돌아보라>로 세상 나들이를 했다. 3개월간의 ‘개나리반 수업’을 완결하는 작품이 ‘자화상’이었다. 2001년에는 ‘미술시간 그 이후’를 주제로 해, 변주된 작품을 선보였다. 왜 그토록 오래 그림은 ‘공백’이었을까? 이제는 결코 놓을 수 없는 ‘친구’요 ‘연인’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선명한데. 그 의문을 그림으로 풀었다. <늦바람>은 꽤 오랜 동안 자신들에 천착했다.

 

“저는 제가 대범한 사람인 줄 알았죠. 큰 선으로 휙, 휙 하고 붓을 거침없이 휘저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림을 그리니까 알겠더라고요. 저는 결을 따라가다 보이는 작은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거였어요. 저는 섬세한 사람(웃음)이었던 거죠. ‘이게 아닌데?’ 해봤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그림은 나를 드러내주죠.”

 

국제기구에서 활동을 했던 행순씨가 발견한 자기는, 생각의 자기와는 달랐다. 이렇게 자신을 찾자, ‘마음의 평온’이 찾아왔다. 그리고 벌어진 상황들. 중심이 잡히자, 마치 컴퍼스처럼, 다른 다리가 세상으로 떠나는 여행을 재촉했다. 한쪽 다리는 마음 안에 둔 채. 붓을 넘겨 잡고는, 자신을 성숙시켜가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늦바람 (4)늦바람 (5)

 

그림으로 마을과 만나다

2002년에 <늦바람>은 ‘우리동네 숨은 이야기’를 진행했다. 성수지역의 청소년 문화행사로 시작해, 벽화를 그리고 우리 고장 지도를 만드는 일. 이 일은 2004년 경동초등학교 벽화로 이어지고, 2005년 옥수금호동의 금호대우 제2아파트, 2006년 관악구의 도림천, 2007년 노원구 번동, 2008년 성북구 장위동과 서대문구 은평 등기소 등으로 이어졌다. 늦바람은 지역의 벽 위를 마구 달렸다.

 

성동구에도 <늦바람>이 그린 벽화가 여럿 된다. 놀이터 담벼락에, 산동네 초등학교 등굣길에, 그늘을 드리운 동네공원 구석에 붓질이 스쳤다. ‘행복한 담벼락’ 프로젝트 ‘서울시’ ‘서울문화재단’ ‘구청’ 등의 지원을 받아 아이들과 함께 하는 벽화작업이었다. 이주연 씨는 말한다.

“아이들과 함께 그려요. 대개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이 주축이 돼요. 자기 마을에 무엇을 그릴까 생각하죠. 그 아이디어를 스케치북에 먼저 그려요. 그리곤 분필로 밑그림을 그린 다음, 색칠로 들어가죠!”

 

아이들의 그림은 빛나는 아이디어, 탁월한 솜씨하고는 거리가 좀 멀다. ‘선수’들 혹은 ‘프로 미술가’가 그려내는 ‘맥락’도, 지형지물을 이용해,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묘미도 없다. 아이들은 다만, 자신들이 본 세상을 사람, 집, 하늘, 나무를 반복할 뿐이다. 아이들은 ‘그저’ 그린다. 어른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려고 하겠지만, 아이들은 그리고자 하는 걸 그림으로 담아낸다. 아이들은 생각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 친구들과, 낯모르는 어른과도 무엇인가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잠시 몸으로 체험한다. 그리고 이 그림이 엄마아빠의 기쁨이 된다는 것을 안다. 자신이 느낀 기쁨이 그 증거다. 마을을 환히 밝히는 것도 안다. 이들은 그림을 소중히 지키려한다. 그건 ‘내’가 그린 그림이니까.

 

늦바람 (6)

 

2013년 6월 21일, 불볕더위를 뚫고 열린 저녁 일곱시 반의 강연, 앞에 화가 박불똥이 섰다. 강의는 3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에어컨 물을 받는 양동이 물이 흘러넘쳤다. 열강을 마친 그는 <늦바람>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훑어보고 왔다고 했다. 그가 말했다. <늦바람> 사람들도 알고 있는 말이었다. “이곳은, 개성적인 자기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하는군요!” 이주연 사무국장은 박불똥의 작업실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비쳤다. 박불똥은 흔쾌히 청을 받아들였다. 여느 때와 비슷한, 그러나 전혀 다른 사람과, 공간을, 이들은 다시 경험할 것이다.

 

작업실 가까운 곳으로 야외스케치를 가고, 그의 작업실에서 대담같은 만남을 갖고, 술잔을 기울이고 음식을 해 같이 먹는 일. 그 안에서 어떤 이는 ‘으샤으샤’의 기운을 찾기도 하고, 어떤 이는 영감을 얻는다. 혹은 고된 밥벌이의 여정에서 잠시 휴식을 갖는 이도 있다. 이전에 해왔던 것처럼. 자신의 눈을 갖고, 자신들의 도구를 갖고, 자신들의 성취를 이루며 그것으로 타인들과 연대하는 삶. 사람들 안에서 함께 사는 것. 그 안에 생의 진경이 있다는 걸 <늦바람>은 몸으로 안다. 그들이 그리는 것은 그림이 아니라, 그 삶의‘함’자체이다.

 

늦바람은

늦바람은 2호선 상왕십리 4번 출구 바로 앞 건물 5층에 있다. 지금보다 더 좁은 곳에도 있었지만, 성동을 떠난 적은 없었다. 성동은 늦바람의 고향이니까. 회원들은 매월 5만원(신입), 6만원(기존)씩 내서 공간을 유지하고, 상근자에 대한 최소한의 경비를 지불한다. 화실은 밤낮으로 유지된다. 주부들의 낮 시간과 직장인들의 저녁반은 자연스레 나뉘어있다. 회원들은 두 달에 한번 ‘대중강연’에, 한 달에 한 번 갤러리 탐방에, 일주일 한두 번 있는 수업에 꼭 출석하려 노력한다. 5월에는 서울대 소아과병동에서 페이스페인팅 등 봉사도 한다. 늦바람의 누리집은 cafe.daum.net/nbaram이다. 그림도 사람도, 깊숙하게 들어가 다양한 세계를 만날 수 있도록 하는 집, 늦바람이다.

 

* 이 글은 책 '성동아, 마실가자'(성동구, 2014)에서 발췌해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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