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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섬 시리즈 4부작] 그 섬의 발자취를 스케치하다 2부 “노들섬에 마을이 있었다?”

2016.10.26
도시계획국 공공개발센터
전화
2133-8363
“노들섬에 마을이 있었다?”

 

모래벌판이었던 노들섬이 언제부터 본격적인 섬의 모습이 되었을까

 

노들섬이 모래밭에서 섬으로 바뀐 것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였다.

1917년 일제는 한강 북단의 이촌동과 남단 노량진을 연결하기 위해 ‘한강철제 인도교’를 건설한 것이다. 또한 남북 연결을 위해 다리가 지나는 모래언덕에 흙을 돋우어 석축을 쌓아 올린 33,000㎡ 규모의 원형 인공섬을 만들어 놓고 이곳을 ’중지도(中之島)‘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이 인공섬은 남측 한강교와 북측 한강소교를 연결하는 중간 구조물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었다.

 

1925년 대홍수로 북측 제방이 유실되어 1929년 북측 한강소교는 결국 철거되었고 대신 그곳에 현재의 교량(게르버교)이 신설되었으며 이후 1934년부터 1937년 10월 사이 남측에도 현재의 교량(타이드 아치교)이 신설되었다. 현재도 노들텃밭 입구 왼편에 당시 쌓은 석축과 돌난간이 남아있다. 노들섬에 가게 되면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촌동과 노량진을 잇는 인도교 건설로 인해 더욱 많은 이들의 왕래가 이어졌으며 1930년대엔 노들섬까지 전찻길이 놓이고 한강인도교역도 생겨나게 된다. 주변엔 100만여 평의 한강백사장이 형성되어 있어 중지도 까지 잡풀과 갈대숲이 우거진 가운데 사람들은 모래언덕과 물웅덩이 사이를 걸어 노들섬으로 강 구경을 하러 가곤 했다고 한다. 30년대부터 대중에게 사랑받던 민요 ‘노들강변’ 은 당시 이 곳 노들강과 주변에 대한 애정과 낭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구슬픔이 느껴지기도 한다.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 무정세월 한허리를 칭칭 동여서 매어나 볼까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믿으리로다. 푸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가노라.

 

<한강교 설치(1917년) 전후 상황>

한강교설치전후1횡성순보

노들섬에 마을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다음 두 지도를 비교해 보면 이 설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1915년과 1921년 지도를 보면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된 부분이 정확히 노들섬의 위치인데 이곳에 꽤 큰 마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마을 이름은 ‘신초리’ 라고 불렸으며 지도 이외에 이 사실을 증명해주는 내용이 1906년 황성순보 광고기사에 나온다. ‘신초리에 거주하는 이’ 라는 문구가 실려 있는데 광고기사 내용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관련기사가 나왔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한 일이다. 신초리 마을 옆에 철도국 수원지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도 마을이 있었던 근거가 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도성에서 한강사이에 사람들이 많이 살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마을이 생길 경우 자생적으로 발생되었고 이렇게 자생적으로 발생된 마을은 자연적으로 물 피해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구릉지에 만들어졌다. 그래서 신초리의 위치도 땅에서부터 꽤 높은 위치에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 높은 위치로 인해 양쪽의 다리가 걸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의 이름은 신초리>

신초리1915

신초리1921 용산나루터
<1915년>   <1921년>   <용산나루터>

  또한 1915년 지도의 모습을 보면 용산쪽으로 나루터가 있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용산나룻터의 풍경이 어땠을까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고 다만 사진만 몇 장 남아 있지만 이 사진으로 정확한 위치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도에 정확한 나루터의 흔적으로 봐서 이 지점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또한 1921년 지도에는 1917년 세워진 인도교가 보이고 나루터가 사라진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아예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는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아마도 1917년 한강 인도교가 설치되면서 발생된 변화라 생각된다.

1921년 마을은 이전마을과 비교해 볼 때 골목도 꽤 형성되어 있었고 많이 번화해진 모습이다.

한강대교1917

인도교 설치 후 또 하나의 변화는 철제다리를 걸어서 건널 수 있다는 사실에 이 인도교를 건너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1900년 세워진 한강 최초의 다리였던 한강철교가 있었지만 이 철교는 차량과 사람이 건널 수 없는 다리였기 때문에 사람이 건널 수 있는 다리의 건설은 주변상황을 급속히 변화시키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에게 ‘철제다리’를 밟고 한강을 건너는 경험은 ‘근대’를 실감하게 하는 것이었다.

    <1917년 만들어진 인도교 : 지금의 한강대교>   

 위의 인도교 사진은 1917년 한강인도교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모습이며, 인도교가 개통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광고 사진이다. 일본식 옷차림의 여인네들도 보이고 듬성듬성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사진을 찍기 위해 꽤 신경을 쓴 듯하다.

    

<1930년대 노들섬은...>

1936년지도 중지도소공원 매일신보1937
<1936년 지도> <중지도 소공원 설치 및 전차연장> <1937.6.29. 매일신보>

 1930년대가 되면서 지금의 노들섬의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는 1936년 지도를 보면 동그라미 형태의 중지도를 연상케 하는 공간이 조성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곳에 소공원을 만들고 전차가 연장되었다고 한다. 이 주변의 중지도를 공원으로 만들고 용산에서 이곳(노들섬 위치)까지 전차가 들어온 것이다. 노들섬까지 전차궤도가 놓여 한강인도교역이 생겼고 노들섬은 가난한 연인들의 단골 데이트코스가 되었다. 당시에도 여기가 아주 행락지로서 중요한 곳이었던 것 같다.

1930년대에 다리가 새롭게 건설된 이유는, 서울의 영역이 한강 이남으로 즉 영등포 쪽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에 교통량이 증가함에 따라 다리를 바꾸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중지도에 공원을 새롭게 단장한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 공원의 땅이 비어있지 않고 원래 마을이 있던 곳이기 때문에 마을을 존치시키고 일부에 공원을 조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을이 존치되었다면 지금 노들섬의 모습은 달라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50년말지도

아마도 1930년대 철교가 놓이면서 그때 마을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공원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50년대 말 지도를 보면 30년대 공원의 흔적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68년 한강종합개발계획으로 인해 백사장이 사라지고 섬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데 개발 이전인 1950년대에는 모래벌판이 남아있는 것으로 봐서 아직 완벽하게 다리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50년대 말 지도>  

 

 <노들섬의 다리 형태>

 - 노량진에서부터 노들섬까지 타이드 아치교, 노들섬부터 용산까지 게르버교

아치형철교 남북다리형태1 남북다리형태2
<한강인도교-아치형 철교 / 1936>  <한강대교 남북다리형태 / 2005년>

노들섬을 가운데 두고 남북의 다리 모양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현재 한강다리는 노들섬을 중심으로 노량진에서 노들섬(남쪽)까지 아치형태로 되어 있다.

또한 이 부분의 교각의 간격은 넓고 노들섬에서 용산까지의 교각의 간격은 좁다. 왜냐하면 노들섬에서 용산사이(북쪽)는 물길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리를 놓기 쉬워 촘촘하게 쌓은 것이고 노들섬에서 노량진(남쪽)은 물길이 깊기 때문에 교각을 최소화한 것인데 넓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안정화시키기 위해 아치형태로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한강다리의 모습을 보면 아치가 있는 부분(노들섬을 중심으로 남쪽)이 원래의 물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각이 촘촘한 북쪽 부분의 경우, 여러 차례 변화가 생기면서 물길로 확장되었기 때문에 그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생겨난 것이라 본다.

 

<노들섬 이름의 유래>

 노들섬이란 이름은 어디에서부터 찾을 수 있을까

일제는 1917년 한강대로를 놓으면서 한강변 모래언덕의 흙을 타원형으로 돋우어 다리를 받치고 이를 중지도(中之島)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이후 1995년 정부에서 추진한 ‘일본식 지명 개선사업’에 따라 비로소 지역 연고에 맞는 ‘노들섬’이란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용산의 맞은편을 예부터 노들 또는 노돌이라 하고 앞 한강을 노들강이라 부른데 기인한다. 일설에 의하면 ‘노들(또는 노돌)’의 사전적 풀이는 ‘백로(로鷺)가 노닐던 징검돌(량梁)’이란 뜻으로 조선 태종 14년(1414년) 이곳에서 나루(津)를 만들어 노들나루란 이름이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 한강 남쪽 동네의 옛 이름, ‘백로가 노니는 징검돌이 있는 나루’ 바로 지금의 ‘노량진동(鷺梁津)’ 이다.

 

 광복이 되면서 찾아온 노들섬의 운명은 어떻게 전개되는지 다음 스토리에서 이어간다.

 

 

           * 검수인 : 안창모 교수(경기대학교)                글쓴이 : 공공개발센터 박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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